쉽게 읽는 브라질 경제 이야기: 브라질 제국 – 1808년에서 1888년까지 (4부)

브라질은 다양한 상품들을 수출하며 항상 세계 무역 중심에 있었다. 처음에는 빠우 브라지우, 세기별로 설탕, 금 그리고 19세기에서 지금까지는  커피까지이다.

그렇지만,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는 무역을 통해 벌어드린 돈은 고스란히 지배 국가로 돌아갔고, 브라질의 개발은 그들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1822년 브라질 제국이 창업되었고, 다시 경제 호황을 맞게 된 브라질은 그렇게 얻은 막대한 부를 어디에 썼을까?

당시의 시대 오피니언 리더들은 커피 남작 (Barão de Café)들이었고, 그들과 제국의 내각이 조금만 더 미래를 내다봤다면, 커피의 시대 역시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수요가 줄어들게 되며, 한 상품을 기반한 경제는 기본 틀 자체가 안전하지 않아, 쉽게 위기로 이어지는 게 상식인데, 이들은 이런 것들을 무시한 채 당장의 오늘날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부는 영원하지 않으며, 자본이 쌓여있을 때 미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동시대의 미국은 이민자들의 유입과 농업 혁명을 이루어냈고, 교육은 1770년 토머스 제퍼슨이 주장 한 대로 국가의 토대를 위해 기반이 잡혀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신문과 성경을 읽을 정도로 수준이 매우 발달했다. 이에 반면, 브라질은 영원할 것 같던 노예무역과 커피의 이익에 취해, 제대로 된 발전을 못 했다.

적극적인 인프라 투자 그리고 늘어나는 외채 

19세기 중반 브라질 경제는 커피의 생산과 운반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프라 투자를 했었는데, 제한된 비전과 예산을 갖고 있던 브라질 제국은 영국으로부터 막대한 대출을 통해 여러 철도를 건설했었다.

1884년에만 해도 건설된 철도의 길이가 6114km이었고 이외에도 1,650km의 철도가 건설 중이었다. 이 모두가, 국민들의 교통편의보다는 커피 농장들의 수출을 돕기 위한 철도들이었으니, 21세기 오늘날 수출들이 철도의 존재조차 볼 수 없는걸 고려하면, 매우 아이러니 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외채이다. 독립자금으로 영국으로 받은 외채의 규모는 줄어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파라과이 전쟁이 다가오자, 500만 파운드였던 규모가 두 배로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철도 사업으로 외채는 제국 말기 이미 3000만 파운드 수준으로, 자금의 추가 유입도 있었지만, 기존 대출을 갚기 위한 또 다른 대출인 Founding Loan의 수준도 매우 늘어났다.

브라질에서 왜 이렇게 기준 금리가 높냐고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그것은 결코 하루 이틀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국 때부터 시작된 외채가 가진 있는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된다.

몰락의 시작. 파라과이와의 전쟁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막대한 비용이 지출된다. 파라과이와의 트러블은 먼저 우루과이 내정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여기서도 경제적인 배경이 있다. 당시 산토스와 히우 데 자네이루 중심으로 상품들이 내륙으로 운반되기 위해선 해안가를 통해 파라나강과 우루과이강들이 이용되었는데, 이런 브라질 입장에서 우루과이의 주도권을 잃게 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따라서, 1863년 브라질은 우루과이에서의 야당인 꼴로라도 지도자 Venâncio Flores를 지원해, 당시의 집권당인 블라꼬 당을 몰아낸 것이었다. 이것은 파라과이의 지도자였던 Solano López에겐 위기로 다가왔는데, 이 이유는 역시 경제적인 배경으로 파라과이가 유일하게 바다로 나갈 방법은 우루과이를 통해서였다. 결국, 브라질과 껄끄러웠던 파라과이 입장에선 주도권을 뺏기게 되니, 배수진을 치며 선제공격을 가하게 된다. 

파라과이는 브라질의 마또 그로소와 히오 그란지 두 술 지역에 공격을 가했으며, 아르헨티나엔 군대를 이동 할 수 있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해당 지역도 공격을 가했다. 결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3개국이 Tríplice Aliança을 구성해 6년간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으며, 총 44만 명의 사상자, 그중에서도 파라과이 측에만 30만 명이라는 사상자를 낼 정도로 매우 잔혹했었다.

브라질은 이 전쟁을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고, 동 빼드로 2세는 자신의 사위를 직접 보내 Solano를 끝까지 추격하라고 명하였다. 여기서 관찰을 해야 할 점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아메리카 대륙의 유일한 제국이자 황제라는 타이틀을 가진 동 빼드로 2세 입장에선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라, 제대로 이 대륙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두 번째는 영국으로부터 또 다른 대출이다. 전쟁의 비용을 대기 위해선 브라질 정부는 로스차일드 은행으로부터 4백만 파운드, 당시 외채의 3/1 수준의 규모의 대출 받아야 했다.

노예제도의 폐지

파라과이 전쟁은 1870년에 끝났고, 브라질의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비록 무역 수지는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이마저도 커피 (1870년도 수출에 56.5%)로 인해서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사실상 모든 상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커피 농장들의 노동력 기반은 아직도 노예였다. 그렇지만 브라질은 이미 국제적으로, 특히 영국으로부터 노예제도의 완전 폐지 압박을 시달리고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자 이제는 내부적인 여론도 형성이 된다.

당시 전쟁엔 총 20만 명의 군대가 참전을 했는데, 이들 중에는 백인 포르투갈계 브라질인들과 물라또 (브라질인과 원주민) 그리고 흑인들인 노예들도 함께 참전했다는 것이다. 백인들이 집에서 노예로 부리던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하였으니, 매우 아이러니 했을 법만 하다.

그렇게, 1871년 Lei do Ventre Livre로 노예의 자녀들은 해방이 되었고, 1880년에는 브라질내륙에서도 노예무역이 전면으로 금지된다. 그리고 1885년에 65세 이상의 노예들을 해방했으며, 1888년 그 유명한 Lei Aurea를 섭정자였던 Princesa Isabel가 서명함으로 노예제도는 브라질에서 전면적으로 폐지가 되어,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노예는 해방된다.

예견된 제국의 몰락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시점, 커피의 수출은 61.5%였고, 세계에서의 브라질 커피 점유율은 이미 절반을 넘길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그리고 세계는 현대화되어 입헌군주제는 형식상으로 유지가 된 채 많은 국가는 공화국으로 전환을 하고 있었다. 커피 남작들은 그토록 자신들이 반대했던 노예제도를 폐지한 제국에 불신을 공개적으로 표출해, 결국은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1889년 동 빼드로2세를 포함한 황족들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여, 공화국을 선포한다.

피를 흘리지 않은 채 공화국 선포를 했다는 것은 언뜻 평화적으로 보이나, 반대로는 브라질 제국의 힘이 얼마나 약했는지, 또 내부적으로 지지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 분명히 보이며, 겉으로는 강한 중앙권력체제를 유지해 보였던 브라질 제국은, 커피 남작들과 기득권으로부터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게 되었다.

19세기 말, 브라질은 약 천만 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 중 151만 명은 노예 출신, 39만 명은 이민자들로, 여전히 생산성이 매우 낮은 국가에다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도 없을 정도였고, 이제는 오갈 길이 없는 노예들이 많은 국가였다.

브라질한인회, 재외동포재단 후원 쌀 100포 23일 배부…

브라질한인회(회장 홍창표)에서는 오는 23일(목) 오전 10시에 재외동포재단(이사장 김성곤)의 후원으로 생활이 어려운 한인 가정을 위해 선착순으로 100포의 쌀을 K-Square(대표 제갈영철) T층에서 배부한다.

한편, 이번 행사는 제36대 한인회의 마지막 나눔 행사이며, 한 가정당 1포씩(5kg)의 쌀이 배부 될 예정이다.

상파울루 한인타운 봉헤찌로, 다채로운 한국문화 행사로‘들썩’

한복 퍼레이드에서부터 한국 전통 및 케이팝 공연, 추억의 놀이에 이르기까지 상파울루 한인타운 봉헤찌로가 오후 내내 온통 한국 문화행사가 열려 축제분위기로 들썩였다.

주상파울루총영사관(총영사 황인상)과 브라질한인문화예술연합회(회장 이화영. 이하 브라질예연)에서 공동주최하고 브라질한국무용협회(대표 이화영) 주관으로 지난 10일(금) 오후부터 한국전통벽화 기념식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한국 문화 체험장에선 한국 추억의 놀이들이 등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뽑기 부스 앞에선 남녀노소 관계없이 많은 인파들이 이른 시각부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로 성황을 이뤘다.  또한, 다른 부스에서는 딱지치기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였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진행됐다.

우승자들에게는 푸짐한 선물이 부상으로 걸린 가운데 약 30여명의 참가자들은 술래의 외침과 눈을 피해 각자 개성이 돋보이는 몸동작으로 가까스로 도착점에 도착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이들에게도 큰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 날 뽑기 부스 총괄을 맡은 손정수씨는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5시간 동안 약 130여개를 만든 것 같다”며 ‘더운날씨에 불과 싸우느라 힘들었지만 우리 문화를 소개하고 반응도 좋아 마음은 충만하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앞서 2시부터 K-Square쇼핑 2층 루프탑 행사장에서 시작된 한국 벽화 오프닝행사를 마친 후 참석 인사들은 사물놀이팀과 함께 선두에 서 약 4백미터 거리에 위치한 한인상징물 ‘우리’앞 까지 걸어서 행진했다.

참석 인사들은 후아 쁘라찌스 길에 설치된 여러 대형 벽화들을 둘러보며, 탄성을 자아냈고, 그 뒤로 한복을 입은 수 십명의 봉사자들의 행렬이 뒤를 따랐다. 상징물 ‘우리’ 앞에서 사물놀이 장단에 맞춰 한바탕 놀이를 즐긴 후 한복 퍼레이드 일행은 곧 바로 후아 조세 빠울리노길로 이동해 퍼레이드를 이어갔다.

연도에 나와 퍼레이드를 지키보던 현지인들은 너도나도 폰을 들고 동영상 찍기에 여념이 없었고, 퍼레이드로 인해 일부 구간 차량정체 상황이 발생하는 불편도 감수하며 차 안에서 행렬을 향해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모습도 목격됐다.

이렇게 큰 호응 속에 진행된 퍼레이드는 한인타운 지역 관할 오토바이 및 순찰 군경대원들의 안내와 호의를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됐고, 모두들 야외특설무대가 설치된 공연장까지 안전하게 이동했다.

4시부터 브라질 국내에서 작가로 활동 중인 이규석(필명 Nick Farewell)작가의 재치있는 입담으로 재미를 더한 무대공연에서는 어머니합창단을 시작으로 밴드, 전통무용 그리고 케이팝무대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일부러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왔다는 한류팬에서 한인 및 지역 주민들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흥겨운 무대에 박자에 맞춰 함께 호흡하며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가하면 고전놀이 등으로 모처럼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

이 날 유독 눈에 띈것은 넷플리스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인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핑크솔져’와 참가자들의 녹색 운동복 복장을 입은 이들이 행사장을 활보하면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한 참가자는 더운 날씨로 땀을 흘리는 동안에도 너도나도 ‘사진 찍자’며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며 마냥 즐거워했다. 공동주최측인 브라질예연에서는 이번 행사에 발맞춰 극중에 등장하는 여러 소품들을 한국에서 직접 공수해 오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이화영 회장은 “해당 소품을 주문했지만 인기도 인기지만 연말을 맞아 과연 제 날자에 도착할 수 있을지가 큰 걱정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날자에 맞게 소품들이 도착해서 다행이고, 현장에서 모두들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그간 마음고생한 보람을 얻는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 날 무대행사는 이화영 브라질예연회장이 무대에서 금번 행사를 위해 수고해 준 임원단 그리고 모든 자원봉사자들을 일일히 호명하며 소개,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순서를 끝으로 모든 행사의 막이 내려졌다.

멕시코한인회, 현지 경로우대증 단체 발급 지원

멕시코 정부가 60세 이상에게 다양한 할인혜택 제공하는 복지제도

멕시코한인회(회장 엄기웅)는 멕시코 복지당국과 협의해 현지 언어에 어려움을 겪는 60세 이상 한인동포들이 멕시코 정부가 발급하는 경로우대증을 단체로 발급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12월 16일 전했다.    

한인회는 “12월 15일 오전 10시에 60세 이상 한인동포 20여명을 대절한 버스에 모시고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구청에 위치한 연방 복지부 경로우대증 발급 센터로 이동해 경로우대증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멕시코에서 경로우대증을 소지하면 공식적인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식료품점, 식당, 법률사무소, 회계법인, 호텔, 박물관, 서점, 대중교통, 미용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무료 또는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방정엽 멕시코한인회 수석부회장은 “멕시코는 외국인에게도 차별 없이 복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며 “2022년에도 추가 신청을 받아 60세 이상 동포들이 경로우대증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제37대 브라질한인회장에 권명호 변호사


제27대에 이어 두 번째 한인회장 맡게 돼

제37대 브라질한인회장에 권명호 변호사가 선출됐다.

브라질한인회는 지난 12월4일 오전 상파울루에 있는 K-Square에서 임시총회를 열어, 지난 11월12일 브라질한인회장 추천위원회(위원장 박동수)로부터 추대를 받은 권명호 후보에 대한 인준 투표를 진행했다.

총 188명이 참석한 임시총회에서 권 후보는 찬성 154표, 반대 18표, 무효 및 기권 16표를 받았다.

권명호 신임 회장은 현직 변호사로 지난 2001년부터 2년간 제27대 한인회장으로 일했다. 제36대 한인회에서는 정관개정위원장을 맡았다.

브라질 동포사회 소식>>

경제 사절단에 환영 자리 마련한 고우석, 홍넬손 회장 , 한인사회 경제 활성화에 큰 기대

브라질을 방문 중인 1차 경제 사절단(단장 김대웅)에 홍넬손 한인회장이 오찬을, 고우석 한인타운발전회 회장이 만찬을 마련했다.

개인적 자리 마련으로 이뤄진 가운데 한인 사회에도 경제적 효과가 이뤄지기를 기대했다.

이미 성과를 이룬 사절단에 축하를 전했으며 연장 기간 동안 건강하기를 전했다. 사절단은 6일 월요일 다시 브라질리아로 이동한다.

브라질 탑뉴스 미디어

쉽게 읽는 브라질 경제 이야기 3부 – 브라질 제국 마우아의 일대기

마우아 남작, Barão de Mauá (1813-1889)은 브라질 제국때의 기업인으로, 브라질의 산업화를 주도한 인물로도 매우 유명하다. 19세기 당시 마우아는 프랑스, 영국, 미국을 포함해 중남미 3개 국가에서 16개의 법인을 운영 했으며, 1867년에 집계한 자산이 1억 5,500만 파운드로 같은 해의 브라질 정부의 예산이 9,700만 파운드였으니, 그의 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1872년 마우아는 브라질과 유럽을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을 건설함으로, Barão (남작)의 작위보다 더 높은 Visconde (자작) 작위를 받았지만, 역사는 그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을 했던 남작의 시기가 그리웠는지, 그를 Barão (남작)으로 부른다. 19세기 유일하게 자력으로 한 기업을 일구었고, 자신의 가문 문양에 새긴 가훈인 “열심히 일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 (Labor Omnia Vincit)” 을 믿어 노예제도를 혐오했던, 바렁 지 마우아의 삶을 소개 한다.

브라질에 유일무이했던 비즈니스맨 Barão de Maua

우루과이 근처인 Arroio Grande에서 태어난 바렁 지 마우아의 본명은 Irineu Evangelista de Sousa이다. 그의 유년기는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이리네우는 5살이 되자, 농장에서 소를 관리하는 아버지가 강도 무리로 인해 살해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8살 때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삼촌이 있는 히우 데 자네이루로 이사를 하게 되며, 상인의 삶이 시작된다.

9살 때부터 가게에서 일을 시작한 이리네우는, 간단한 업무인 카운터에서부터 일을 시작했고, 11살에는 João Rodrigues Pereira de Almeida 노예 무역상이자 도매상 밑에서 일을 하면서, 신뢰를 쌓은 뒤에, 그가 파산 직전으로 가자, 주요 거래상이었던 스코틀랜드인 Richard Carruthers의 밑에서 일을 하며 영어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Carruthers는 이리네우에게 신뢰가 쌓이자, 1839년 브라질에서의 비즈니스를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며, 영국으로 돌아간다. 이리네우 역시 이 시기에 영국을 방문하면서, 산업화의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당시 많은 사업가가 선택을 하던 노예무역이나 커피 농장이 아닌, 자본을 이용한 산업과 관련된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첫 비즈니스: 조선사

당시의 브라질 무역수지는 매년 적자였으며, 경제부처에서는 산업화를 위해 여러 노력을 했지만, 이마저도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기업가 정신을 가진 있는 사업가들도 부족 했다. 그렇게 의회에서 통과 시킨 것이 Alves Branco (1844) 법안이다. 이 법안은 수입 제품 중 국내 생산품과 같을 경우 60%, 그리고 같은 생산 품목이 없으면 30%라는 매우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법안이다. 이리네우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정한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던 Carruthers & Cia 상사의 지분을 매각하고, 그다음 해인 1845년 Ponta da Areia에 Estabelecimento de Fundição e Companhia da Ponta da Areia (뽄따 다 아레이야 중공업 – 조선 및 주물) 인수한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정부의 산업화 사업을 참가하기 시작했던 이리네우는 Maracanã강의 수도사업을 시작으로, 증기선과 커피 농장들에 필요한 각종 공업기구를 생산하기 시작을 하게 되어, 그의 자산은 불과 1년만에 4배로 증가하였으며, 이미 1천여 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직원들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실화 하나가 전해지는데, 이리네우가 조선소를 인수를 했을 때 약 20여명이 넘는 노예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노예들에게 해방을 안겨주었고, 또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면서 고용을 했었다.

브라질의 첫 민영 은행 설립과 철도

지난 편에도 다뤘듯이, 1850년 브라질에서는 노예무역이 전면적으로 금지되며, 브라질 경제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중 하나가,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었던 노예상들은 반 강제적으로 은퇴를 하게 된 것이다. 이리네우는 바로 이점을 노려, 이들의 자본으로 본격적으로 브라질에서의 산업화 시대를 열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리네우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융자하기 위해 은행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즉, 은행은 노예 무역상들에게 투자를 받고, 그 자금은 자신의 비즈니스에 융자를 주는 형식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부의 역사학자나 경제학자들도 비판의 시각을 감추지 않는다. 어쨌든, 자신이 직접 융자를 해서 이루어낸 비즈니스는 다양했다. 대표적으로는 히우 데 자네이루 시의 가스등 설치와 아마조나스강 운항권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상징적인 건설은 바로 철도였다. 

브라질에서의 첫 철도는 이리네우의 산업화를 향한 야심이었다. 그 첫 구간으로 선택된곳이 바로 과나바라만 (baía de Guanabara)에서 Serra da Estrela (Petrópolis)까지 총 14KM의 구간이었다. 철도는 커피 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브라질 경제에 생산성을 불어넣었고, 이리네우는 이걸 더욱더 확대하길 바랐다.

그리고 이때 건설한 첫 철도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리네우는 Barão (남작)의 작위를 받게 되는데, 이름을 마우아 (Mauá)라고 해서, 항간에는 Mau Há (나쁜 의도가 있다)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물론 Mauá는 tupi guarani의 단어로 유래되었다고 한다. 

커피 생산의 중심은 상파울루였고, 마우아은 불가능을 도전하게 된다. 바로, 산토스 – 쥰지아이 구간의 철도 건설이다. 지금도 해변가로 가려면 Serra(산)을 내려가야 하는데, 바로 이 Serra가, 해발 800M라서, 당시의 기술로 이 위를 지나가는 철도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우아는 영국의 최고 엔지니어인 James Brunless를 브라질로 데려와 프로젝트를 연구를 한 뒤에 실행에 옮겨, 철도는 8년의 건설을 거쳐 1867년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산업화의 주역 자리를 두고 다툼: 동 빼드로 2세와 마우아

비록 마우아가 브라질의 산업화를 위해 엄청난 일들을 ‘최초’로 이루어냈지만, 브라질의 황제인 동 빼드로2세와 엘리트층엔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역사는 몇 가지의 사례로 그것을 입증한다.

첫 번째는 노예 제도에 대해서였다. 노동은 곧 생산이라고 생각했던 마우아와 다르게, 당시의 귀족들은 힘을 쓰는 노동은 곧 하층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특히, 브라질 제국의 내각 일원들은 대다수가 포르투갈 Coimbra 법대 출신들이 많은 보통 엘리트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례는, 여러 차례역사로 입증되는 것이, 마우아는 늘 언제나 Comerciante (상인)으로 내각 구성원들에게 하대 받았다고 하며, 심지어 이들은 남작의 작위도 돈으로 일구어낸 것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또한, 하원의원으로 정치도 했었던 마우아는 노예제도 폐지를 하는 소수의 정치인 옆에 섰기 때문에, 커피 농장 주들을 포함한 기득권층은 그를 달갑지 않았다.

두 번째는 산업화 주역 자리를 다루고 다툼이었다.  마우아가 조선소로 돈을 벌자, 첫 번째로 시도한 사업이 바로 금융업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정부는 간접적으로 은행들을 규제하며 관리하는 중앙은행이 아닌 화폐 발행 업무를 겸한 시중은행으로 Banco Oficial do Brasil을 창립하게 된다.

여기에서 Oficial (정식)의 단어는, 자연스러운 견제였고, 결국 신뢰를 잃게 된 마우아의 Banco do Brasil은 자연스럽게 정부에서 창립한 은행과 합병이 되어, 브라질의 투자자들의 자본으로 비즈니스를 이루려고 했던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철도사업도 마찬가지다. 마우아가 먼저 시작을 해서, 1차적인 성공을 거둔 뒤 2차인 산토스-쥰지아이 구간에서 융자 부분에서 애를 먹자, 브라질 정부는 영국 은행들 대상으로 자신들이 직접 건설을 하겠다고 하였고, 당시 마우아는 로스차일드가로부터 융자를 받고 있었는데, 이들은 마우아 대신 브라질 제국에 융자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브라질 정부는 마우아가 이미 건설해놓은 Magé – Petrópolis와 일부 겹치는 Estrada de Ferro Dom Pedro II를 건설함으로 마우아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

명예로운 퇴진 그리고 이어지지 않은 유산

마우아를 오늘날의 비즈니스맨과 비교를 한다면, 전형적인 자본주의 모델 비즈니스맨이다. 이를 쉽게 보여주는 특징은 (1) 비즈니스의 사이즈/스케일 (2) 본인 자본이 아닌 투자 또는 융자로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융자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은 매우 리스크가 컸다.

그가 파산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영국 자본이, 브라질 정부의 철도 사업 개입으로, 그가 확대하고 있었던 여러 철도 사업에 대한 융자를 서서히 중단을 한 점이었고, 두 번째는 그 역시도 보호무역으로 큰 이득을 얻고 있었지만, 1860년 Alves Branco (높은 수입세) 법안이 철회되자, 그의 조선소와 주물공장은 유럽의 수입품에 크게 밀리게 된다.

1878년 그의 나이 65세의 나이로 공식적으로 마우아 은행의 모라토리엄 (지급유예)를 선언했고, 그 이후로 자신이 가진 모든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큰노력을 한 뒤에 70세에 나이로 모든 빚을 청산하자, 다시금 사업가로 활동 할 수 있는 허가권을 받게 된다.

그는 빚을 청산하기 1년 전 Exposição aos credores e ao público (채권자들과 모든이들에게 공개서한)이라는 165페이지의 책을 발간한다. 브라질에서는 마우아를 끝으로, 이후 오랫동안 국가를 변환시킬만했던 기업인들은 더 나오지 않았다. 저자 :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

제6대 노인회장에 조복자씨 취임…노인회관 건립 및 다양한 사업 추진

 제6대 노인회장으로 조복자(70. 사진 왼쪽)씨가 취임했다.

대한노인회브라질지회(이하 노인회)에서는 지난 18일(목) 저녁, 한인타운 봉헤찌로에서 이.취임식을 개최했다.

이창만 신임 수석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취임식에는 황인상 총영사를 비롯 한인 각계 주요 단체장 및 관계자, 노인회원 등 약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국민의례에 이어 김진탁 이임회장은 대한노인회 등록증 및 노인회기를 조복자 취임회장에 전달했으며, 황인상 총영사 등은 축사를 통해 감사와 축하 메세지를 전했다.

김진탁 이임회장은 “지난 2년간 팬데믹 상황으로 노인회가 이렇다할 활동을 못한 점에 죄송스럽다”라며 “새로 취임하는 조복자 회장과 함께 앞으로 노인회가 새롭게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며, 지속적인 지지와 응원을 당부했다.

조복자 취임회장은 “고령의 나이와 불편한 몸도 마다하고 그간 노인회를 위해 직접 발로 뛰시며 헌신해 주신 김진탁 회장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라고 전했다.

또한, “노인들의 쉼터인 노인회관 마련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열정을 갖고 끝까지 애정을 보여주신 마음을 잊지 않고 간직하겠다”고 다짐한 후 향후 노인회관 건립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및 향후 노인회 운영에 대한 구상을 내비쳤다.

조복자 노인회장은 ”우선 노인회의 숙원인 노인회관 마련을 위해 회장단이 구성되는 대로 회관 건립 위원장을 추대해 진행해 나갈 것이며, 아울러 노인회 운영 기반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행사도 기획해 새롭게 도약해 나갈 계획”아라면서 아무쪼록 한인 단체 및 한인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협조를 당부했다.

브라질 코로나 백신접종 3억회분 넘어

일평균 사망·확진 작년 4∼5월 이후 최저

브라질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3억 회분을 넘어섰다.

브라질 보건부는 19일(현지시간)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날까지 백신 1차 접종자는 1억5천760만여 명, 접종을 완료한 사람은 1억2천980만여 명이라고 밝혔다.

부스터 샷(추가 접종)을 맞은 사람은 1천300만여 명이다. 보건부는 현재 73%를 약간 웃도는 성인 접종 완료율을 최대한 빨리 85%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20일부터 또다시 대대적인 백신 접종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다.

이날까지 누적 확진자는 2천200만3천317명, 누적 사망자는 61만2천370명이다. 전날과 비교해 확진자는 1만3천355명, 사망자는 226명 늘었다. fidelis21c@yna.co.kr

쉽게 읽는 브라질 경제 이야기

브라질 식민지 1492년에서 1808년까지 (2부)

(사진 설명: 콜롬버스 아메리카 대륙 발견)

브라질 경제 역사는 단순히 브라질에서만 일어나는 경제 활동만 보면 안 된다. 먼저 브라질은 탐색형 식민지라, 포르투갈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과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같이 살펴봐야지 올바른 분석을 할 수 있다.

중세시대가 지난 뒤의 포르투갈 경제는 농업(와인, 곡물)과 군사 활동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은 무역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당시 처음으로 벨기에 브뤼허에 포르투갈 상품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오늘날, 한국무역공사인 KOTRA에서 한국의 지역적인 물품을 갖고 브라질 시내 한 호텔에서 무역상담회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면 된다. 그리고 이들은, 영국이 단일국가 이기 전부터 와인, 올리브, 어류, 등을 통해 철과 천을 무역하였다.

막상 대서양을 항해하는데 있어서 15세기 유럽인들은 거대한 물고기 괴물과 오징어 대마왕 있다고 믿었기에, 쉽게 항해를 할 수 없었다. 물론, 항해 한번 하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고 리스크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당시의 부의 원천은 인도의 향신료들로 오늘날의 석유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양한 향신료는 음식의 맛을 가중해, 유럽인들의 선호 제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항해 시대, 그리고 포르투갈은 빠우 브라지우를 멸종시키다 싶이 다 가져간 뒤에 설탕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의 백금, 설탕

(사진 설명: 사탕수수 농장)

설탕의 시대에 대해선 두 가지 측면을 꼭 살펴 봐야 한다. 먼저, 브라질에서의 사탕수수 농장들은 100% 브라질의 개발을 위한 농장들이 아닌 모두가 수출기반의 농장들이었다. 포르투갈은 언제나 그랬듯이, 브라질의 발전과 개발에 관해 관심이 전혀 없었다. 브라질은 그들에겐 언제나 그랬듯 캐쉬카우 (잘 키워놓기만 하면 평생 우유를 생산하는 젖소에 대한 은유적 표현)였다. 그리고 두 번째 관점은 바로 인구였다.

결국, 캐쉬카우를 유지하기 위해선 많은 노예의 유입이 필요 했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인디언들보다 더 선호되었던 이유는, 인디언들은 일을 하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정글 속에 있는 자신의 부족으로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고향 땅을 떠나 짧은 수명 (당시 평균 30대)을 갖고 있었던 노예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살아가는 나날들이었다.

설탕은 16세기 세계의 주요 코모디티 (경제 개념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상품)로 포르투갈의 세입에 5%를 대표하였다. 그렇게,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우라질’ 이였던 포르투갈의 브라질이 이제 그들의 경제 한 부분의 중요성을 얻게 된다.

내수 시장과 Fiado (보증) 시작

북동쪽 (Nordeste) 중심으로 사탕수수의 농장들이 잘 나가기 시작하자, 내수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특히, 내륙인들의 거래가 생겨나는데, 이때 주요 물품들이 가죽, 콩, 쌀, 까샤사, 등이었다. 당시 식민 브라질의 경제 성장률은 본국인 포르투갈보다 더 높았다고 하니, 그의 비중의 어느 정도 느껴질 것이라 생각이 된다.

분명 이때도, 젊고 아웃사이더인 귀족들 중에서 “브라질로 떠나자! 나는 부자가 되고 말겠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내수 시장이 시작이 되면서, 내륙인들 간의 거래가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의 화폐는 Real이었다. Santa Casa de Salvador은 은행이라고 하긴 조금 어렵지만, 그 역할과 비슷한 것을 했었는데, 바로 이곳에 은들을 보관했고, 또 사탕수수 재배와 관련해 대출을 해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식민 브라질에서는 화폐로 거래가 되긴 보단, 물물교환이 가장 활발했다. 그리고, 화폐가 없거나 물물 교환이 안될 때엔, 바로 보증 (Fiado)를 했다.

(식민 브라질 금 세금 징수)

Fiado는 브라질에서 가장 오래된 금융모델(?)로 인정을 받고 있다. 정말, 어디를 가더라도 Fiado가 될 정도였으니, 돈이 없으면, 내 이름을 걸고 “내일 낼게요~” 라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브라질의 자본주의 시작은 바로 이 Fiado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반대로 물물교환과 Fiado는 국가의 경제 기틀을 잡는데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바로 국가가 세금을 걷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세금 징수는 발견되는 금으로부터 했었는데, 금을 사용하기 위해선 Casa de Fundição (1580년 창립) 주조소에 보내져 1/5은 분리해 세금으로 징수되었고, 금에는 왕실의 문양을 새겨졌다. 이로 인해 생긴 말이 Quinto dos Infernos이다.

세계는 발전으로 그리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자본에 취해

어쨌든, 식민 브라질에서 나오는 금의 물량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이베리아 연합을 구성하면서, 실질적으로 식민브라질의 지배 주도권을 잡았다.

당시 스페인의 주도하에 1580년 40만이였던 사탕수수 나무의 생산이 1610년 4백만으로 증가 하였다. 그렇게 이베리아 연합은 식민 브라질에서 얻은 막대한 금과 이익에 취하고 있었고, 세계는 처음으로 무역수지에 중요성을 알게 된다. ‘

즉 수출을 수입보다 더 많이 하면 경제가 개발한다는 간단한 원리이다. 또한, 당시의 국가 간 거래가 금과 은으로 되니, 이를 많이 쌓아놓으면 놓을수록 부유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세계는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금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역사가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단기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현상 속에 사회에 대한 발전의 고민이 없었다는 점을 맹렬히 비판한다. 결국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듯이, 돈만 많다고 개발이 되고,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것을 몸소 실천 한 국가가 바로 영국이다.

(사진 설명:영국 명예혁명)

영국은 자본주의가 사회 시스템으로 안착하기 위해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나갔고 또 이를 지탱을 할 수 있는 기관을 정부 그리고 민간에서 만들어나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688년 명예혁명이다. 명예혁명은 의회민주주의 출발과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판사해임 권한의 삭제로 명실상 우리가 오늘날 익숙 해있는 삼권분립, 즉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구성으로 각 권력이 서로 견제하는 시스템이다.

브라질에선?

(사진 설명: 반데이란찌스 인디언 부족 토벌 )

이베리아 연합의 해체 그리고 황금기였던 설탕 시대가 막을 내리자, 브라질은 새로운 활로가 필요했다. 1600년에는 Bandeirantes들이 이주를 하게 된다. 이들은 포르투갈에서 온 정착민들로 주로 금은을 발굴하는 데에 주력을 했고, 그렇게 1693년 Ouro Preto (Vila Rica)에서 최초로 금이 발견된다. 이어서 1725년 다이아몬드까지 발견이 되었으니, 이는 식민 브라질의 경제 3막인 광산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3부에서 계속 됩니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 2021년 브라질 중앙은행 혁신프로그램 (LIFT Lab) 선정, 2020년 브라질 100대 혁신스타트업 선정. 마켄지 광고홍보학과 졸업, FIAP 정보마케팅 대학원 수료,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